겨울 바다에 머물러
이츠키 슈가 겨울 바다로 떠난 것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학기가 모두 끝난 겨울의 중반은 심심하면서도 다들 어른이 될 준비로 바쁜 시기였다. 대부분은 아이돌을 그만두고 진학을 선택하나 소수의 선택받았다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아이돌 활동을 이어가는 시기. 그 선택받은 소수라고 볼 수 있는 이츠키 슈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선배, 그거 아세요? 지금 겨울 바다가 굉장히 예쁘데요."
허나 그의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 겨울 바다를 보러 가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마침 라이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음 라이브를 준비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기. 평소와 같았다면 여전히 혹독한 훈련으로 페이스를 유지했겠지만 졸업을 앞둔 이츠키 슈는 가끔은 예상치 못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츠키 슈는 충동적인 결정이나 기꺼운 마음으로 아야메 유즈가 안내하는 겨울 바다로 향했다. 전철을 타고 이동하는 것은 그에게는 꽤나 생소한 경험이었으나 사랑스러운 연인과 함께 하는 새로운 경험은 언제나 나쁘지 않은 것이었기에 기꺼이 전철에 몸을 올렸다. 다행스러운 것은 학교를 빠지고 여행길에 올랐기에 전철 안에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도착하게 된 겨울 바다는 아야메 유즈의 말대로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곳의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차갑고 제가 머무는 곳을 아는 듯 짭짤한 느낌이 들었으나 결코 매섭지는 않았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모래사장과 바다는 흔히 여행지를 홍보할 때 말하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고운 모래사장이라는 말이 절로 생각날 만큼 아름다웠다. 비록 모래사장의 위에 홍보 팸플릿에서 보는 것처럼 예쁜 조개껍데기나 불가사리가 떨어져 있지는 않았지만 이츠키 슈 조차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말할 수 있다. 하나 이츠키 슈의 눈에 들어온 관경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단연코 그의 사랑스러운 연인 아야메 유즈였다.
"...선배, 잠깐 걸을까요?"
백옥 같은 피부는 모래사장의 위에서 더운 정교한 도자기처럼 매끄럽게 빛났으며 바다와 대비되는 색의 분홍빛 눈은 사랑스러웠다. 그뿐만 아니라 집게핀으로 집어 올린 보랏빛의 곱슬머리는 싱그러운 포도송이에서 뽑아온 듯 제 자태를 뽐냈으며 평소와 다른 새로움이 감미료가 되어 그녀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그런 그녀가 이츠키 슈의 눈에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의 취향과 부합하는 머리색과 눈 색이 아니더라도 그의 가장 아름다운 인형... 아니 그는 더이상 사람을 인형으로 평하지 않기로 하였으니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라면 단연코 그녀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이 아름다운 관경과 함께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에 이츠키 슈는 오늘의 휴식이 이것 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었다 생각하게 되었다.
"있죠, 저희가 만난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가네요. 아직 조금 남았지만요."
첫 만남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하게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 아야메 유즈가 미소를 띠며 말하자 이츠키 슈는 자연스럽게 그녀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고 말았다. 자신의 무대를 앞두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유즈의 모습이란. 지금에야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자신의 무대를 모욕했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었어 호통을 내지른 것을 떠올렸다.
"그 첫만남이 공연을 보러 온 날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웃음이 늘어난 아야메 유즈 만큼이나 날카롭고 위태로웠던 이전과 달리 자연스레 농담을 꺼낼 여유를 갖게 된 그였기에 이제는 이 겨울 바다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분위기를 환기시킬만한 가벼운 농담을 던질 수 있게 된 이츠키 슈였다. 그리고 그런 연인의 농담에 아야메 유즈는 기꺼이 사랑스러운 웃음을 머금었고 이츠키 슈 역시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하, 너무하세요 선배. 그날은 정말... 불가항력이었는걸요."
그 농담에 한참을 웃은 두 사람은 이제는 웃을 수 있는 추억을 떠나보내며 겨울 바다의 해안선을 따라 느릿하게 발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리하며 나누는 잡담은 실 없는 것이었으나 이츠키 슈는 그것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기 초의 그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으니까. 그는 학기 초의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다. 흔히 말하는 망가져 버린 사람이었다. 회생이 불가할 정도로 도태되고 부서져버린 마음을 가진 그런 사람. 그가 지금 사람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은 분명 아야메 유즈 한명의 덕분은 아닐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지금의 이츠키 슈가 이츠키 슈로 있을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은 분명 그가 사랑하는 연인인 아야메 유즈라 할 수 있다. 그녀가 그의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말 할 수는 없지만 어느새 스며들어와 그의 인생을 한층 더 찬란하게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을 진실이니까.
"선배, 기억 나세요? 그때 저희 매점에서 만났을 때요. 전설의 크로와상... 어쩌면 그게 선배와의 인연을 이어줬는지도 모르겠어요."
작게 웃는 아야메 유즈의 모습에 시선을 빼았긴 이츠키 슈는 한 박자 늦게 그날의 일을 회상했다. 자신의 가슴팍에 머리를 부딪혔던 그녀와의 신체 접촉과 창 너머로 보이는 전설의 크로와상 진열대가 빈 것을 보곤 한껏 불쾌한 기분을 느꼈던 기억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때 분명 아야메 유즈는 자신에게 아무 말도 없이 냉큼 크로와상을 넘겼던 기억이 있어 이츠키 슈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감으로 그녀에게 질문하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 어째서 내게 크로와상을 넘겼던 게야?"
"아 그때... 사실 이어질 선배의 호통이 무서웠거든요."
어색하게 볼을 긁적이며 하하 웃는 아야메 유즈의 모습에 이츠키 슈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자신이라면 분명 그녀에게 크게 호통 쳤을 테니까.
"음... 아무튼, 아! 그러고 보니 그때 수예부에 찾아간 것도 사실 선배와 카게히라 군이 궁금해서였어요. 아시다시피 제 친구가 두 분의 엄청난 팬이거든요."
"흠? 처음 듣는 이야기군. 확실히... 수예에 관심 있다기엔 고운 손이긴 했지."
이츠키 슈는 본격적으로 아야메 유즈의 외모에 관심을 가졌던 그때를 떠올렸다. 이전에는 분노로 제대로 보지 못했던 얼굴은 상상이상으로 잘 빚어낸 도자기 인형과 같아 관심이 갔기에 순순히 그녀의 임시 가입을 받아줬던 기억을 회상했다. 그리고는 슬쩍 옆에 있는 아야메 유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보다는 조금 더 성숙해진 얼굴, 여전히 사랑스러운 얼굴이어서 이츠키 슈는 저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 선배?"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게다."
그는 자신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순순히 납득하고 다시 걸음에 집중하는 제 연인의 모습을 보았다. 작은 소동물이 뽈뽈 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모습이 절로 웃음이 이어질 정도로 사랑스러워 저도 모르게 그 볼을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돌아오는 반응은 더욱 의문에 가득 찬 동그란 눈동자였지만 그럼에도 불만 한번 없이 순한 모습이 여전한 사랑스러움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 선배."
그렇게 이츠키 슈가 아야메 유즈에게 빠져갈 즈음 갑작스럽게 이츠키 슈를 부른 아야메 유즈가 작은 보폭으로 이츠키 슈 보다 한 발자국 앞서 나아가기 시작해 어느새 몇 발자국이나 앞서 나아가 그를 돌아봤다. 그런 모습에 발걸음을 멈춘 이츠키 슈는 물끄럼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또로록 굴린 아야메 유즈는 이내 그에 눈에 사랑스럽게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제가 고백했을 때 기억하세요?"
"....물론인 게다. 지금도 생각하면... 하아, 바보 같은 짓을 했었지. 물론 그 바보 같은 짓을 바로 잡아 다행이지만."
처음 그녀가 자신을 카페로 불러냈을 때 그는 갑작스러운 고백에 순간 마비된 사고로 반사적으로 그 고백을 거절하고 말았다. 허나 이내 카페를 나온 순간 자신에게 다시 한번 고백하는 아야메 유즈에 그는 마침내 진심으로 그 고백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있죠... 그러니까 이번엔, 선배가 해주실래요?"
갑작스러운 부탁에 눈을 동그랗게 떠 아야메 유즈를 바라보자 그녀의 희고 고운 귀는 어느새 이로 말 할 수 없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이츠키 슈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카카카카...! 이리 오게. 물론인 게야."
그 말에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몇 발자국 다가가 이내 겹쳐졌다. 이츠키 슈는 사랑하는 제 연인을 품에 안아 그 둥근 이마에 입 맞추며 몇 번이든 해줄 수 있는 말을 속삭였다.
"사랑한다는 게다. 유즈, 나의 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