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欺欺人
自欺欺人 자기기인
자신을 속였기에 남조차 속이는 것은
결국 자신도 진실을 알지 못해
스스로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변환점은 7살 때였다.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기 좋은 무료한 시기,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여느 남자아이들과 같은 로봇과 쫄쫄이를 입은 레인저들 따위가 아닌 여자아이들과 같은 나풀나풀하고 예쁘게 꾸미는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어머니와 함께 꾸며본 거울 속 내 모습은 객관적으로는 잡지의 모델들과 비견할 수 없겠지만 나 스스로는 마치 그들이라도 된 것 같아 설레는 기분을 들게 하였다. 아직 어렸던 그때의 나는 사랑이라던가 좋아함 같은 감정들을 어찌 정확하게 깨닫게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때의 나는 이것이 사랑이며 좋아함이라는 감정임을 확신했다. 물론 나르시스트 같은 의미에서의 좋아함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꾸미는 것에 대한 즐거움, 그뿐이었다.
허나 어린 나는 그 즐거움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 어린 나이에도 자신 스스로가 타인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던 것이었는지 스스로가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고 인정한 그 순간부터 나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네이든이라는 딱딱한 이름 대신 거울 속 사랑스러운 자신과 닮은 레인이란 이름을. 하지만 비를 의미하는 그 이름은 나의 암울한 미래를 예측했을지도 모르겠다. 비 내리듯 추적추적한 나의 인생을.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10살이 되기 전까지의 나는 그럭저럭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아직 아이들에게 순수함이라는 것이 남아있고 악의가 희미한 시기이기 때문 아닐까 감히 추측해 본다. 어찌 되었건 이유는 중요치 않고 중요한 것은 10살 이전에 나에게는 세상을 사랑해도 될 이유가,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도 괜찮을 이유가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나 스스로에게 솔직 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것을 행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스스로가 남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 그때는 세상을 사는데 두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허나 시간이 흘러 내가 10살쯤 되었을 무렵 아이들은 슬슬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다만 그에 크게 충격받지는 않았다. 스스로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즐거운 시간이란 것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하지만 그 줄이고 줄인 충격이 나름대로의 큰 상처가 되었던 지라, 아마 나의 예민한 성정은 그때 나를 피하고 얼떨떨해하던 아이들의 시선을 파악하려던 나의 노력이 빚어낸 노력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나는 그런 나의 노력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으며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에 바보였다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테니까. 스스로에게도 부정당하는 이 마음이 어찌 썩어 문드러 지지 않겠는가.
-촤악
과거를 회상한다면 언제나 이 기억을 빼놓을 수 없다. 이름과 얼굴이 또렷하여 꿈결에서도 잊을 수 없는 그 아이의 주도로 물세례를 맞은 그때를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때의 상황, 주변인들의 동정과 비웃음 섞인 시선, 차가운 물의 감촉과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시는 물방울 소리. 그 모든 게 지금도 눈을 감으면 마치 그 상황에 놓인 듯 선명하다. 그때의 나는 내가 어째서 그런 물세례를 맞았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분노했으나 동시에 수치스러워 했고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교실을 뛰쳐나가 화장실로 달려갔었다. 그렇게 무력할 때가 있었고 그만큼 순진했던 때가 있었다. 아마도 나 스스로까지 속이기를 결심한 것은 그때 물 세례 이후가 아닐까 싶다.
어찌 보면 물세례 보다 중요한 기억인 내가 연극부에 들어가기로 다짐한 이유는 솔직히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허나 지금에서야 되돌아보자면 뻔하디 뻔한 이유였을 것이 분명하다. 지속되는 괴롭힘과 힘없고 무력한 나의 반응을 즐기던 아이들, 그들에게 더 이상 먹잇감을 주지 않기 위해 연기를 시작했던것으로 기억하지 못하나 헤아린다. 실제로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나 자신까지 속이지 못했을때의 나는 단순하고 우둔하며 그저 어리석은 아이였으니까.
연극부에 들어가 연기를 배울 무렵 괴롭힘이 점점 잦아들었던 기억을 회상한다. 연기를 배우며 점점 무감해지는 나의 반응에 그 악마와 같은 아이들은 흥미가 떨어졌는지 더이상 나를 집요하게 괴롭히지 않았다. 가끔 신기한 동물에게 관심을 던져주듯 나를 툭툭 건드렸을 뿐이다. 그리고 그 즈음 나는 세상과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괜찮냐는 작은 위로 한마디 없던 주변인들과 가족들에 대한 신뢰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을지라.
그렇게 나는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에게서 배운 스스로를 숨기는 것으로 그들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공식에 따라 스스로까지 속이는 연기를 시작했다. 예민한 성정을 숨기고 여유를 연기했다. 강한 용사님이 아닌 유약한 공주님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허나 스스로를 치장하는 것은 계속되었다. 적어도 이것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으리라 생각했기에.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믿고 싶었기에. 언제부터인가 오기로 이어나가 이것이 정말 사랑인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스스로를 치장하는 것은 나의 유일하게 남은 사랑하는 자신이라 차마 버릴 수 없었다. 정확히는 버리지 못했다가 맞을지 모르겠지만 중요치는 않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미련이든 아니든 간에 상관없이 나에게 삶을 영위하게 해주는 지표라는 것이었다. 스스로까지 속이느라 잃어버린 길에 남겨둔 유일한 나의 지표.
나는 어떤 사람일까. 이제는 답 할 수 없고 알 수도 없다. 10살 이전의 나는 스스로를 꾸미는 것을 좋아하던 소년이었으며 그 이후의 나는 스스로를 잃어가나 여전히 좋아하는 것을 놓지 못한 미련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나는 스스로까지 속여 타인을 속이는 완벽한 거짓말쟁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답할 수 없는 질문. 그것이 나를 정의하는 모든 것이었다.
이것은 나에게 받치는 장송곡.
살아남기 위해 연기하기 시작하여 타인을 속이다 결국 스스로까지 속여버린 우둔한 이야기.
그저, 사랑하고 싶었고 좋아하고 싶었을 뿐인 소년의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