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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t the virgin road

샌드위치 커미 2023. 12. 11. 01:33

*앙스타 슈미카 cp

*슈모브 요소

*분륜요소

 

"어이~ 카게히라~"

 

"응앗? 니시기미군?"

 

 쉬는 시간, 소년은 음료수 캔을 뽑기 위해 자판기를 찾아 복도를 걷고 있다 자신과 같은 학년의 동급생을 마주해 꼼짝없이 그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야 했다.

 

"들어봐, 들어봐. 이번 주말에 말이지~"

 

굳이 그 이유를 찾자면 동급생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만만하고 구면인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고 마침 같은 복도를 지나던 소년이 그와 안면이 있었으며 무리하지도 않은... 아니, 무리한 부탁이라도 부드럽게 거절하지 못하는 성정을 가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정확히는 타인을 불편해하기에 생긴 성정이겠지만 그것은 지금 그리 중요한 쟁점은 아닐 것이다.

 

"--- 그래서 봐봐, 이거 전문 기사가 찍어준 웨딩 영상이거든? 요즘 세상 진짜 좋아졌다니깐~"

 

동급생이 걸어온 쓰잘대기 없는 대화의 주제는 바로 저번 골든 워크에 있었던 동급생의 사촌누나의 결혼식에 대한 내용이었다. 가만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결혼식에 참석해 축가를 불렀다는 자기 자랑에 불과한 그 나이대 청소년들이 흔히 하는 자신의 능력을 남에게 과시하는 별 볼 일 없는 대화였지만 소년은 그것에 주목하지 않았다.

 

"---"

 

원래도 흘러 넘겼던 동급생의 말소리는 이제 묵음에 가깝게 처리되었고 소년은 동급생의 핸드폰에서 재생되는 신부가 걷고 있는 웨딩 로드에 고정되었다. 동급생의 말대로 최신 기법인지 카메라는 신부를 담지 않고 신부의 시점에서 긴 웨딩 로드를 지나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신랑이 그 끝에서 신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얼핏 보이는 신부의 치맛자락에 소년은 과거 자신의 스승님이 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분명 귀여운 드레스를 입어본 적 있다고 했던가. 레이스를 좋아하는 스승님의 성격상 조금 더 프릴이 들어가고 부드럽게 퍼지는 재질로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 옷자락을 보고 있으니 어느샌가 시점은 신랑의 바로 앞까지 와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묘한 이질감에 신부의 시선에 맞춰 그 신랑을 보고 있자니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불리는 결혼식이어서인지 장신의 키를 가지고도 위압감 없는 모습과 어딘가 섬세해 보이는 그 모습이 체형도 생김새도 모두 다르건만 왜인지 그의 스승을 떠올리게 만든다.

 

확실히 스승님이라면 저리 단조로운 정장은 입지 않겠지. 재질도 저리 뻣뻣한 재질이 아닌 부드럽게 흐트러지는 하지만 모양감이 잡히는 원단으로 투피스가 아닌 다채로운 색을 사용한 쓰리 피스의 정장으로. 또한 가슴팍의 주머니에 끼워진 손수건도 저리 깔끔하게 접힌 원단이 아닌 고급 극세사를 사용한 직접 뜬 레이스 손수건에 이니셜을 박아 넣을 것이 분명하지.

 

소년은 어느샌가 영상 속의 신랑이 달리 보이는 것을 느꼈다. 분명 마주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 스승의 드레스를 입은 귀여운 어릴 적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건만 어느새 자신의 스승이 신랑의 자리에 서 자신이 상상한 정장을 입고 환히 웃으며 신부의 손을 잡아 주례가 있는 웨딩 로드의 끝으로 이끄는 장면이 보인다. 

 

그런 스승의 손에 이끌려 옷자락만 간간이 보이던 신부가 마치 영상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카메라에 담긴다. 초록빛이 도는 흑발은 아슬아슬하게 뒷 목을 덮고 있으며 행복에 취해 눈을 감으며 환히 웃고 있는 입에는 흰 덧니가 보인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미인이라 생각이 들지만 그리 감흥은 느껴지지 않는 신부는 어느샌가 카메라가 아닌 신랑을 보고 있다.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아 제 스승으로 보이는 신랑과 그 손을 잡은 신부의 모습을 더욱 눈으로 쫓다 보면 그럴 리 없건만 앞을 보고 있던 신부가 멈춰 선 카메라에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주는듯한 착각이 일어난다. 고개를 돌려 카메라에 시선을 둔 신부의 눈은 금안과 벽안의 오드---

 

"--래서... 응? 어이~ 카게히라, 듣고 있는 거지?"

 

자신을 부르는 동급생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다시 영상에 눈을 돌리자면 신부도 신랑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초면. 더욱히 방금 전 겹쳐본 두 사람과도 전혀 닮지 않은 모습에 소년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다.

 

"으... 응, 미안타. 잠깐 영상에 집중해서 제대로 못 들었는데 뭐라한기고?"

 

"그러니까 말이야~---"

 

다시 이어진 동급생의 이야기를 도저히 소년의 귀에 닿지 않았다. 두 발짝 정도 떨어져 있을까 하는 동급생의 목소리보다 귓가에서 울리는 심장박동 소리가 시끄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이상타. 시... 심장은 갑자기 왜 이리 뛰는 긴가.'

 

자화자찬에 빠진 동급생을 뒤로 소년의 고개를 점점 떨궈졌다. 크게 울리는 심장 박동은 아무리 동급생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려 해도 전혀 들리지 않고 오히려 바보 같은 짓이라는 듯 심장박동 소리만 거세진다. 울렁거리는 마음에 숨을 깊이 들이쉬면 마치 결혼식장에서나 맡을법한 어지러운 향수냄새와 인공적인 꽃내음에 두통을 거세져만 갔고 아무래도 싫은 이 마음을 토해내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들었다. 제대로 된 사고가 되지 않는 것을 자각하자 머리에서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고 상기되는 볼을 타고 삼켜지는 침으로 내려와 방금 전 신랑의 손위에 얹어진 신부의 손끝과 같은 곳에 도달하자 저림이 느껴졌고 손을 꽉 쥐어보자니 이상하리 만치 다른 부분이 차가워짐을 느꼈다. 마치 신랑이 잡은 신부의 손만이 모든 것인 것처럼.

 

'이상타.... 너무 무리해서 이런 긴가? 이대로라면 스승님을 걱정시키고 말기다...'

 

소년은, 카게히라 미카는 생전 처음, ...아니 그의 스승이 닿지 않았는데도 느껴지는 이 감각이 혼란스러워져 메스꺼운 속을 게워내고 맺힌 눈물을 털어버리고 싶다 생각했다.


10분만 갇혀있어도 미쳐버린다는 아무것도 없는 하얀 방. 물론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그런 하얀 방은 아니었다. 애초에 방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크기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순백의 하얀색,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그런 방이 아닌 오히려 테이블과 장식들이 가득한 평범한 예식장이었다. 그의 스승의 취향대로 곳곳에 깔려있는 테이블을 덮고 있는 테이블보에는 순백의 레이스가 가득하며 창가에 걸려있는 천들 역시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패턴을 가진 천들이 한가득이다.

 

'...이런건 스승님의 취향이 아니다.'

 

다만 그뿐. 전체적으로 기교 없는 순백의 식장, 전체적인 디자인은 스승의 손을 탄 것이 분명하지만 세부적인 것들은 꽤나 대중적인 그 사람의 취향. 무엇보다 거대하고 많은 수용인원을 가진 웨딩홀은 특히나 스승의 취향이 아니다. 원체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했던 스승은 지금도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사람이 많은 곳을 기피하니까. 물론 하객이 신부 측의 외부인들만은 아니겠지만 인간관계가 빈말로도 넓다고 할 수 없는 스승이기에 압도적으로 적은 수일 것이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그 사람의 말을 외면할 수 없던 스승이 힘들게 내린 결정의 산물들을 눈에 담는다.

 

스승의 배려뿐만이 아닌 그 사람의 배려까지 담겨있는 이곳. 스승의 디자인이 맞지만 답지 않게 대중적인 취향을 넣은 꾸밈, 그렇다고 해도 일반 결혼식장보다는 몇 배나 화려한 식장. 그뿐만이 아니라 소소한 직원 배치부터 코스요리까지. 두 사람의 취향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고 서로에 대한 배려가 서리지 않은 곳이 없다. 어느 한쪽도 욕심을 부리지 않은 이기적이지 않고 그야말로 이상적.

 

'내라면 이리하지 않았을기다."

 

하지만 미카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이라면 좀 더 아니 완전하게 스승의 취향에 맞춰줄 수 있다. 스승이 배려하는 일 따윈 만들지 않을 것이다. 제 스승은 오해받는 일이 잣지만 언제나 지독하게도 다정한 사람이라 한낱 인형인 나에게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같이 인간으로 살자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그것으로 끝내지도 않고 자신의 말에 책임져주는 다정한 사람. 그래서 졸업 후에도 스승은 끊임없이 자신을 배려해주며 한 명의 사람으로 생각해 주었다. 그러니까 감히 그리 다정하고 배려심 넘치는 사람을 가장 특별하고 행복한 날에까지 배려하게 둘리가 없잖아. 오늘 가장 행복해야 하는 건 스승이니까. 그리고 그런 행복을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카게히라씨~ 잠시만 와주실래요?"

 

"..응앗? 아, 물론이제."

 

한번 도리질을 친 그는 직원이 부른 곳으로 향했다. 이상한 잡념에 사로잡혀서 소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다름 아닌 스승에게 부탁받은 축가인데. 그렇게 조금의 자책을 뒤로하며 직원과 마지막 조율을 하려던 찰나. 여러 꽃과 레이스로 장식된 화려한 문이 열리며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잘 되고 있나. 카게히라?"

 

"스승님!!"

 

진중하게 직원과 대화를 나누던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린다.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시선을 던진 곳으로 향하면 순백의 정장은 입은 이츠키 슈, 그의 스승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이데이~ 스승님의 결혼식 아닌가? 오늘만큼은 걱정없구마!"

 

"음, 좋은 태도인게다. 어디 구석에 박혀 떨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단 말이다."

 

가벼운 담소임에도 미카는 얼굴에 떠오르는 즐거움을 숨길 수 없었다. 몇 주 만에 제대로 된 그리고 일상적인 대화. 결혼식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스승에게 상대해 달라 투정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외로웠데이~...'

 

성주관을 나가고 새로운 집에 물건을 옮기며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스승의 흔적에 울컥이는 울화와 함께 뼈 시린 외로움이 몰려온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그러니 몇 주 만의 나누는 이야기가 더욱 극적이고 행복할 수밖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지만 결혼식을 위해 차려입은 백정장이 스승의 취향에 맞춰 마치 무대의상과 같은 화려함에 마치 함께 둘 뿐인 무대에 오른 것만 같아 상기되는 얼굴음 감출 수가 없다.

 

"그건 그렇고.... 바쁘지 않다면 잠깐 걷겠나?"

 

"응? 어... 그야 물론...."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함께 걷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이야기를 나누던 직원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간절한 마음을 담아 직원을 보자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던 직원이 괜찮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응! 괜찮구마."

 

"....그럼 갈까."

 

그 대답에 의미를 모를 조금은 침울... 아니 걱정이 담긴 것 같은 표정이 슈의 얼굴을 스쳐갔지만 그저 스승이 자신을 위해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이 좋은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함께 스승이 들어왔던 곳으로 나간 두 사람은 근 몇 주간 묻지 못했던 서로의 안부와 함께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잠깐의 시간을 보냈다.

 

'질투나는 구마...'

 

그렇게 잡담을 나눌수록 들려오는 스승이 아닌 그 사람의 이야기에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이제는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그 마음을 잠재웠다. 그와 동시에 의문은 커져만 간다. 제 스승은 중요한 무대... 전에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자칫 심란해질 수 있는 마음을 다잡고 더욱 완벽하고 흠잡을 곳 없는 이상을 위해 머릿속으로 연습을 복기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물을 수 없다. 이미 차고 넘칠 정도의 배려를 받고 있는 자신이 혹여 말을 잘못해 스승을 더욱 심란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괜한 의문은 집어넣고 지금 이 대화에 집중해야 한다. 스승의 눈에 담겨있는 것이 오롯자신이니까. 그 사람의 이야기를 입에 담았어도 그 사람이 아닌 카게히라 미카를 봐주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욕심부리지 않을 테니까.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이쪽을 나를, 그 다신 없을 자수정과 같은 눈동자에 오직 나만을

 

"...카게히라."

 

"...응? 왜 부르나 스승님?"

 

혹여 얼굴에 표라도 났다 황급히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어보지만 평범하기 그지없는 표정이란 것에 안심하면서도 갑자기 대화를 끊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스승에 덜컥 겁이 났다. 무언가 실수라도 한 걸까, 그래서 스승의 마음을 상하게 한 걸까. 안 되는데. 그러면 안되는데. 오늘은 누구보다 행복해야 하는 날인데 고작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그러면 안 되는데. 나였다면 누구보다 행복하게 배려 없이 오로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내가. 스승님을.

 

"카게히라!!"

 

"...!"

 

제 어깨를 잡아채며 높아진 슈의 언성에 자연스레 숙여져 있던 고개가 반사적으로 들렸고 그렇게 올라간 시선 끝에 담긴 스승의 모습은...

 

"정말... 아까부터. 상태가 좋지 않으면 말하란게다. 아픈 사람을 무리시킬만큼 박하지 않아."

 

간질거리다 못해 울렁거릴 것만 같은 다정함과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어서 미카는 속을 게워내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더 이상 배려받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이렇게 배려만 받다 보면... 인형과 다른게 뭐가 있는가.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상호관계가 인간에겐 필요하다. 그러니 나도 당신을 배려해야 하는데. 그런데 바보같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나는.... 나는. 다시. 다시. 그런 쓸모없는. 나는. 당신의. 그런게 되고 싶은게.

 

"...응앗, 그... 그런게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닌 게야. 어디.... 아, 그래. 잠깐 저쪽으로 가서 이야기하지."

 

습관처럼 머리를 쓸어 올리려다 한껏 세팅한 머리에 차마 그러진 못하고 가볍게 미간에 힘을 주며 인상을 쓴 슈가 미카의 손목을 잡고 아무도 없는 비상구로 이끈다. 따뜻한 체온. 놀라서일까 평소보다 체온이 낮아졌는지 잡힌 손목에 홧홧한 느낌이 든다. 그런 손목에서 신경을 돌리려 시선을 돌리자 들어온 것은 초록색으로 빛나는 비상구의 비상등. 사고에 대비하여 급히 피난 갈 수 있게 만든 입구. 사람의 온기가 감도는 결혼식장에서 적막이 감도는 비상구로 우리는 아니 미카는 도망쳤다. 슈의 손에 이끌려. 물론 슈가 그것을 알 길은 없겠지만.

 

"...여기라면 다른 사람에게 들리진 않을게다."

 

굳게 닫힌 비상구 문을 한번. 조금의 짜증? 아니, 걱정을 담아 인상을 쓰는 제 스승을 한번.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있자니 벽 쪽에 가깝게, 하지만 더러움이 묻을까 닿지는 않고 서있던 슈가 한숨을 내뱉으며 미카를 응시한다.

 

"나한테 숨긴 건 없는 게냐 카게히라."

 

"응? 으응... 그런건 정말.... 정말로 없다."

 

딱 하나, 이런 울렁거림을 제외하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이런 추악한 욕망은 스승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숨겨야 한다. 배려해줘야 해, 소중히 아껴줘야 해. 받은 것에 보답하지 않으면 인간이 될 수 없다. 결국 당신의 곁에 섰던 것은 받은 배려를 돌려주고 먼저 배려해 준 그런 인간이었으니까. 더 이상 실수 따위 하면 안돼. 그렇다면 이번엔 오직 둘만의. 우리의 Valkyrie까지...

 

"농! 카게히라! 아까부터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내게 집중하란 말이다!"

 

"응..아...! 아... 미...미안타 스승님... 그러려던게... 그러려던게 아니라..."

 

조금의 짜증이 서려있는 얼굴이지만 그것이 저를 향한 걱정임을 아는지라 차마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볼 용기가 없어 고개를 숙이자 그것이 못내 불만인 듯 조금 강하게 미카의 어깨를 잡아챈 슈가 다시 한번 그에게 강하게 말한다.

 

"무슨 일이 있다면 말하란게다! 아까부터 자꾸 생각에 잠겨있고 집중도 못하고. 농!! 아무리 나라도 어디가 아픈 건지 무슨 문제가 있는지 말하지 않으면 모른단 말이다! 괜히 걱정 끼친다고 걱정하지 말고 말해라! 오늘이 중요한 날이어도 네 문제를 그냥 넘어갈리가 없잖아!"

 

따뜻한 배려. 내가 사실을 말하면 어떻게 변할지 두려움이 몰려온다. 당신은 어떻게 그리 한결같이 다정한지. 처음 나를 주워주었던 그날부터 대체 못할 사랑...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지금까지. 언제나 나를 첫 번째로 두지 않지만 그럼에도 버리지 않고 곁에두는 끔찍한 다정함. 나에겐 당신이 언제나 첫 번째였는데 당신에게는 한 번이라도 그런 적이 있던가. 내가 한 번이라도 당신의 첫 번째가, 유일이 된 적이 있던가.

 

"...뭣?! 우... 우는거냐 카게히라?"

 

오늘 당신은 그 사람과 영원을 맹세하겠지. 그건 분명 나에게 속삭여준 영원과는 다를 것이다. 더욱히 영원할 것 같았던 우리의 Valkyrie도... 결국은 바뀌고 말았으니. 당신은 언제나 내게 다정하지만 스스로 성장해 나를 배려해 주지만. 하지만 그런 걸 원한게 아니야. 그저 당신이 좋다면 좋았으니까. 성장하고 나아가는 당신에 맞춰서 나 또한 그리하려 했는데. 어째서... 어째서 따라갈 틈도 주지 않고 무엇보다 따뜻한 듯 매정하게 먼저 가버리는지. 왜 당신의 첫 번째를 당신의 곁을 내게 내주지 않는지. 인형이었을 때는 그런 것 따위 알지 못했다. 그저 당신의 아름다운 인형이, 당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인형이었으면 충분했는데.

 

인간으로 살자, 카게히라. 우리들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니까
아니, 인간으로 살자고 둘이서 맹세했잖아?

 

당신이 그렇게 말했기에 인간이 되어버렸던 탓이다. 당신과의 맹세에 마법이 걸려 인형은 인간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인형이었을 땐 알지 못했던 추악한 감정이 생겨버렸다.

 

'인형 따위가 인간이 되니까.... 욕심쟁이가 되어버린기다.'

 

"자... 잠깐. 농! 밀지 마라 카게히라! 벽에 붙으면 옷이...."

 

그럴 봐엔 그저 인형인게 좋았어. 함께 인간 따위가 되는게 아니었어. 그저 손길하나 웃음 한 번에 기뻐하고 그것으로 살아갈 수 있는 예쁜 인형이 좋았어. 인형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니까. 언제나 당신의 보살핌이 필요하니까. 인형을 소중히 여기는 당신이니 분명 소중히 여겨줄 테니까. 이런 외로움도 알지 못하고 생각도 못하는 그저 인형. 당신의 인형.

 

외로움, 질투, 증오, 그리움, 동경 그리고.... 사랑. 이 모든 것은 인형에게 필요 없는 오롯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 함께 인간이 되었는데 어째서 나만 당신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왜. 어째서 나만? 이런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느껴야 하는가? 나는 당신을 배려하지 못하는 그런... 그런 것이라 당신의 마음도 이리 아려오길 바라. 매 순간 생각나고 그저 눈길 한 번에 그 하루의 기쁨이 되는 그런 인간으로 만들어버린 당신을. 그런 당신을 나는....

 

나는....

 

스승님

 

나의 신

 

....

 

....

 

아니

 

이츠키 슈

 

나는....

 

....

나는 당신을.... ....

 

"....사랑한다."

 

"....카제히라."

 

벽으로 밀어버린 당신을 올려다본다. 고운 얼굴에 당혹감과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걱정이 서려있고 그와 동시에 조금은 담담한 얼굴.  어쩌면 알고 있었던 걸까? 나보다 나를 잘 아는... 아니 잘 알았던 당신이니까..... 아니,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 또렷한 자수정과 같은 눈이 오직 나만을 담고 있으니까. 좋아. 너무 좋아. 그 두 눈에 나로 가득 찬 게 좋아. 그 몰두한듯한 진지한 얼굴로 나만을 바라봐주었으면 해. 어떤 의미를 담든 상관없어. 나의 한마디를 진지하게 고민해주는 당신이 좋아. 정말로 좋아. 당신이 오롯 나를 몰두해 주었으면 해. 나만을. 오직 나만을.

 

"스승님이 좋다. 동료로서 친구로서 보호자로서 좋다는 그런게 아니다. 당신이 좋다. 좋아하는... 아니 사랑하는기다."

 

"......"

 

드물게 혼란스러운 얼굴. 그럼에도 거칠게 밀어내지 않고 어찌할 줄 모르는 두 눈이 나를 담는다. 아, 좋아. 그대로 계속 봐줘. 다른 곳에 한눈팔지 말아줘. 다른 사람에게 가지 말아줘. 첫 번째가 되지 못하는 걸 알아. 그래서 지금까지 꼭꼭 숨겨왔던 마음. 어쩌면 들켰을지 몰라도 입 밖으로 내는 짓 따윈 하지 않았어. 당신에게 곤란한 인간이 되어버리면... 그러면... 인형은 버려져버려. 곤란한 인형 같은 건 쉽게 버려져버려. 인간은? 인간이라고 다를까? 싫어. 싫어... 인간이 되어버렸으니까 곤란한 인형 따위가 아니니까 그래도... 그대로 당신에게 버려질만한 그런 짓 따위. 차라리 죽어버리는게 나아.

 

하지만... 저질러 버렸어. 버려지는 것 이상으로 싫었어. 전한다고 당신의 유일이 될 수 없다는걸 당신의 영원이 될 수 없다는걸 알지만...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다정을 독점시켜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당신의 다정을 나만의 다정히, 나만의 이츠키 슈가 되어줘.

 

"스승님을 보면 심장이 뛴다. 손이 닿는 곳은 불에 지진 듯 뜨겁다. 착각 같은 게 아닌기다. 사랑이다. 분명 사랑인기다. 스승님이 아니면 안된다. 스승님의 옆에 있고 싶다. 독점하고 싶다. 독점해주면 좋겠다. 스승님의 첫 번째가 되고 싶어."

 

둘이서 인간이 되자고 했으니까. 둘이서 맹세했으니까. 내게 인간은 당신뿐이어서. 아담과 하와처럼 오직 우리 둘만이 인간인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어. 당신이 같은 세계를 살아주지 않는 것을 알아. 당신의 세계는 둘만의 에덴동산보다 넓고 광활해서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는 예술이 있는 곳이라 나의 아담은 당신뿐이지만 당신의 하와는 내가 아닌걸 알아. 그래도 당신은 영원한 나의 아담인걸. 내가 당신의 하와가 아닐지라도. 나의 선악과를 먹지 않을지라도. 내가 선악과를 건내는건, 함께 사람으로 추악해주었으면 하는건 오직 당신. 그날 둘이서 맹세했으니까.

 

"....."

 

더 이상 내 이름조차 입에 담지 못하는 그 얼굴. 나로 인해 피어난 감정. 좋아. 정말로 좋아. 사랑해. 당신의 배려를 되돌려주는 법 따윈 몰라. 웃게 하는 방법은 알지만 그 사람처럼 당신을 웃게 하지 못해. 나는 한없이 그 사람처럼 당신의 앞에서 웃는대도. 알아봐 주지 못한 스승님이 나빠.

 

"정말 좋아한데이 스승님. 사랑한다. 인간이 되기로 한것도 스승님이 그리 말해줬기 때문인지라. 그게 아니라면 인간 따위 되고 싶지 않았다. 스승님의 인형으로 충분했는데. 그걸로 만족..."

 

말을 잇지 못한 이유는 당신의 목소리에 한없는 슬픔과 걱정 그리고 미안함이 담겨있었음인지 아니면 그저 당신이 나를 불러주었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당신의 목소리이기 때문인지.

 

"....카게히라."

 

당신을 올려다본다. 당신을 바라본다. 당신과 눈 맞춘다. 나의 눈에 당신이 담긴다. 당신의 눈엔 내가 담긴다. 당신과 나의 표정을 한 번에 볼 수 있어. 당신이 어떤 마음인지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니야. 그만해야 하는데.

 

아, 버려지고 말아. 버려지고 말거야. 분출해 버렸어. 이러면 귀찮은 인간이 되고 말아. 곤란한 인간이 되고 말아. 마치 처치 곤란의 낡은 인형처럼. 귀찮은 인형처럼. 곤란한 인형과 같이 버려지고 말거야. 차라리 인형이면 나아. 인형이라면 그대로 찢겨죽으면 좋을텐데. 당신이 버려진 나의 천을 누덕한 걸레로 써주어도 좋을텐데. 인간은 그런거 못해. 인간이 되어버리고 말았어. 아. 아. 싫어. 싫어. 인간 따위 정말로 싫어. 인형이라면 버려져도 슬프지 않아. 다시 주워주길 영원히 기다릴 수 있어. 하지만 인간은 인간은. 당신과 동등해져 버린 인간은. 차라리 인형으로 돌아가버리고 싶어. 하지만 스승님 나는. 당신이 눈에 담고 있는 나는

 

"울지 마 카게히라."

 

부드러운 면장갑 안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가 볼에 닿는다. 그대로 볼을 타고 올라가 부드럽게 눈가를 스친다. 당신의 장갑은 내가 흘린 눈물에 젖어간다. 젖어간다. 당신의 장갑이. 나의 눈물로.

 

 

"카게히라 나는..."

 

더 이상 말하지 마.

 

그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발끝을 들고 쓰러지듯 당신의 입술을 덮쳤다.

 

맞닿은 입술에서 당신의 온기가, 당신의 숨결이 내게 닿아온다. 오직 나만의 것. 현재의 나에게 허락된 유일함. 더욱 깊게 입을 겹치며 당신을 탐해본다. 조금만... 조금만 더 당신을 욕심내본다.

 

"...읏"

 

누가 낸 것인지 모를 신음이 비상구를 가득 채운다. 당신과 나의 그림자는 점점 하나가 되어간다. 당신이 조금 굽혀 나에게 맞춰주고 내 팔로 당신의 어깨부터 목까지 감싸 안아 끌어당긴다. 숨이 조금 차오르면 당신이 능숙히 틈을 내어준다. 잠깐에 틈에 내쉬고 들이쉰 숨으로 더욱 당신에게 겹쳐간다. 당신의 팔이 나의 허리를 둘러 단단히 받쳐준다. 다른 손은 올라와 나의 머리를 받치고 그와 동시에 가볍게 눌러 어느새 그림자는 두 사람의 것인지 한 사람의 것인지도 애매해지고 만다.

 

좋아. 조금 더... 조금만 더 이대로. 밀어내지 말아 줘.

입술에서 시작한 온기는 당신이 닿은 모든 곳에서도 느껴진다. 단단한 품. 할 수만 있다면 평생을 이곳에.

 

"....."

 

당신은 제대로 나를 담고 있을까. 당신은 제대로 나를 느끼고 있을까. 깊게 내린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시야에 한가득 담긴 당신은 나를 보고 있어.

 

"....."

 

내가 담긴, 오롯 나만이 담긴 그 눈동자. 그 안에 내가 보인다. 흐트러진 모습의 당신을 탐하며 당신과 하나가 된. 당신과 같은 눈에.

 

....

 

....

 

....?

 

어느새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된 당신은 나와 같아서.

 

....

 

 

"읍... 하아...."

 

당신에게 둘렀던 팔을 풀고 당신의 가슴팍을 부드럽게 밀어낸다. 차오르는 숨에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고 오른 열감으로 어지러움을 느끼며 당신을 바라본다. 처음 보는 표정.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흡... 하.... 하아...."

 

"....."

 

숨을 몰아쉬는 당신이 전에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어. 오직 나 때문에. 나로 인해. 아, 정말.... 정말로...

 

"하아.... 하.... 있잖나 스승님."

 

"... ....?"

 

당신의 눈이 다시 나를 담는다. 내가 담긴 눈으로 나를 본다면 당신과는 다른 내가 서있다. 비슷하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만족스럽게 조금은 희열에 차 웃고 있는 내가 그곳에 있다.

 

"결혼.... 축하한데이."

 

뭐야, 완전히 다르지 않았잖아.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서로에게 닿지 않았을 뿐.

 

"....카게히라."

 

착각일지도 모른다. 오른 열감에 부족해진 산소에 헛것을 봤을지도 모른다.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의 영원도 첫 번째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절대로 변치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축하한다."

 

나만이 평생 당신을 품고 살아가는게 아니다.

당신은 오롯 그 사람만을 품고 살아가지 못할기다.

 

"스승님."

 

나도 당신의 안에 있으니까.

 

당신의 눈동자 속 에덴동산

나는 하와고 당신이 아담.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하와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선물했고

그 선물에 아담은 하와와 함께 인간으로 추락해 버리기로 맹세했어.

 

아담과 하와는 더 이상 둘만의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해.

하와는 아담과 영원하지 못해.

 

그럼에도 서로의 눈에 담긴 것은

에덴동산은 아직도 그 자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