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시작은 루시에게 있어서는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하루였다. 아침에 눈을 뜨자 창밖의 새들은 지저 겼으며 그녀의 엄마가 구워준 프렌치 토스트는 언제나처럼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맛이었다. 그런 평범한 하루였기에 루시는 그날도 역시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아무런 생각 없이 학교로 향하는 횡단보도에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단말마와 같은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내려 꽂히듯 들려왔다.
"조심해...!"
그 소리에 눈을 감으며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던 루시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고 그녀의 눈에 든 것은 분명 빨간 불인데도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자동차와 갑작스럽게 불쑥 튀어나온 정체 모를 하얀 팔과 같이 보이는 것이었다. 하얀 팔?이라는 의문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시야는 뒤집혔고 정신을 차려보니 왠 괴상한 하얀 풍선 인형 같은 것에 안겨 바닥에 나뒹구는 중이었다. 그때까지도 현실 감각이 없었던 것은 아마 그녀가 정체 모를 하얀 풍선 인형과 같은 것의 품에 안겨 있었기에 그녀가 받을 모든 충격을 그것이 받아주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간 모든 일은 정신을 차린 루시가 눈을 세 번 깜빡하기도 전에 끝나 있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루시는 자신이 눈을 세 번 깜빡이기까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 것인지 그 비상한 머리로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일까. 눈을 세 번 깜빡인 루시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까 따위가 아닌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 마치 솜사탕 같아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루시의 눈에는 더욱 사랑스러워 보이는 한 소년이 들어왔으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더벅머리의 소년이었다.
"야, 너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베이맥스! 얘 안 다친거 맞아?"
"물론이에요 히로. 스캔 결과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답니다."
"그런 것치곤... 좀 멍 하지 않아? 이봐! 너 괜찮은 거야?"
소년의 물음에도 유감스럽게 루시의 귀에는 소년의 질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귀에 들어온 것은 사랑스러워 보이는 눈앞의 더벅머리 소년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달콤하다는 것이며 이름이 히로라는 생긴 것처럼 사랑스러운 이름이라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지금 그녀에게 있어서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눈앞의 소년은 정말이지 사랑스러웠으니까!
"어, 응, 물론이지!"
그럼에도 루시가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사랑스러운 소년의 물음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일단 대충 내뱉은 루시의 대답에 히로라는 소년은 안심한 듯이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럼 됐어. 자, 언제까지 누워 있을 건데? 얼른 일어나!"
그리고 그것은 루시에게 있어서 정말이지 일생일대의 위기 상황이었다. 당장이라도 히로의 손을 붙잡고 싶은 것은 굴뚝같지만 그러기엔 외출하기 전 손을 씻은 기억이 없었다. 물론 세수를 하며 자연스럽게 손에 물이 묻긴 했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게다가 베이맥스라고 불리는 하얀 풍선 인형과 같은 것이 자신을 감싸주어 땅바닥을 구르지는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흙먼지가 묻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런 손으로 저 사랑스러운 히로의 손을 덥석 잡는다니, 정말이지 못할 일이었다.
"자, 잠시만!"
그래도 차마 그 손을 거절할 수는 없는지라 자신의 옷에 손을 벅벅 닦은 루시는 히로가 내민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히로의 얼굴을 보며 어리바리를 타고 있는 루시와 그런 루시를 보고 의문을 내보이는 히로를 자리에서 일어난 베이맥스가 한 품에 안아 인도로 이동시켰다. 그 과정에서 루시의 정신은 온통 베이맥스에게 안겼기에 히로와 닿아버린 어깨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깨가 닿았어!!'
그리고 잠시 후 인도에 도착하게 된 두 사람을 베이맥스가 품에서 내려줬고 닿았던 어깨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루시는 어깨가 떨어지자 다짜고짜 히로의 두 손을 잡고는 눈을 빛내며 히로에게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내 이름은 루시 장이야! 편하게 루시라고 불러! 네 이름은 히로야? 반가워! 전화번호 있어? 알려주라! 학교는 어디야? 우리 학교의 전학생이면 정말 좋겠다! 아, 그리고 베이맥스라는 인형? 아무튼 저건 네 거야?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구해줘서 고마워!"
루시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자 히로는 자신이 평소 저럴 때 주변인들이 이런 기분을 느꼈었겠구나 하는 거울치료를 받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는 잠시간의 당황을 끝내고는 루시의 물음에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어어, 반가워 루시. 하하... 내 이름은 네 생각대로 히로야. 히로 아르마다. 그리고 전화번호는... 음, 왜? 아, 전학생은 아닐 거야. 난 샌프란소쿄 대학에 다니거든. 그리고 베이맥스는 내 로봇 친구야."
"안녕하세요? 저는 베이맥스. 히로의 개인 의료 도우미입니다."
그렇게 둘과 인사를 나눈 루시는 끈질긴 물음 끝에 히로에게 전화번호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둘의 첫사랑의 시작이자 첫 만남이었다.
[안녕 히로? 오늘은 뭐 해? 바빠?]
[우리 학교 앞에 맛있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생겼대! 같이 가지 않을래?]
루시는 히로에게 있어 전에 없던 적극성을 보여줬다. 그리고 히로 역시 그것이 싫지는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이제라도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또래 친구와 어울려 보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지만 퍽이나 그런 루시에게 잘 어울려 주었다. 어찌나 잘 어울려 주었는지 그녀와 놀고 난 뒤 집에 들어온 히로의 맥박에 베이맥스가 깨어날 정도로 말이다.
[그래 좋아, 몇 시에 볼까?]
주로 관계를 이끌어 가는 것은 당연하게도 적극적인 루시였으나 히로 역시 그런 루시의 장단에 맞춰 피하지 않고 그녀와 어울려 준 것이 접점 없을 두 사람이 관계를 이어 갈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리고 그 관계에서 두 사람은 친구라기보다는 이성으로, 연인과 같은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었다. 물론 또래의 친한 친구 같기도 하였으나 루시의 적극적인 대시에 두 사람을 보는 사람들은 귀여운 어린 커플이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어리다 뿐이지 눈치 빠른 두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으나 루시의 경우 오히려 그런 착각을 원하고 현실이 되기 바라는 쪽이었으며 히로의 경우에도 마음 한 구석이 간질간질 거리는 느낌이 들어 그리 싫지 않은 기분이 들어 굳이 그 오해를 정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만나는 빈도가 늘어간 두 사람은 다정한 연인처럼 손을 잡고 거리를 걷거나 혼자 가기엔 꽤나 분위기 좋은 카페를 어렵지 않게 다니기도 했다. 주변 인물들은 모두 이 둘이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둘 사이의 거리감은 미묘한 편이었다. 루시가 언제나처럼 대시를 하면 히로가 당황하면서도 싫지는 않아 받아주는 관계. 허나 그 이상의 발전은 존재하지 않은채 그저 그곳에서 머물러 있었다.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애매한 관계. 허나 한쪽이 이 관계의 균형을 깨뜨리면 그것으로 끝날까 두려워 결국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관계가 되었다. 차라리 그들이 처음 만나 소중해지기 전이었을 때가 조금 더 발전의 가능성이 있었을 정도로. 그 둘은 어느새 소중해져 버린 상대와의 인연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 시작되자 루시의 대시는 날이 갈수록 조금씩 약해졌다. 히로가 소중해지면 소중해질수록 그녀는 자신의 행동 하나에 히로를 잃을까 무서워 조심스러워졌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히로가 결심을 굳히게 된 계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루시가 내밀어주지 않았다면 이어 갈 수 없는 관계였고 소중함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히로는 한 가지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루시, 다음 주에 시간 있어?]
[오, 물론이지 히로! 무슨 일이야?]
매우 드물게 먼저 보낸 메시지는 그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걸렸던 5시간의 걱정을 모두 날려주었다. 약속이 정해진 즉시 히로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한 주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 한 주 동안 히로는 누구보다 즐거웠다. 그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대시를 하던 루시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위해 하는 행동은 정말로 즐거운 것이었다.
그리고 한주의 시간이 지나
히로는 루시와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