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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612

by 샌드위치 커미 2024. 2. 26.

사람들은 언제나 의미불명이었다.

 

어째서 그리 매일을 울고 웃는지, 사소한 것에 그리도 울고 웃는지. 매번 그리 반응한다면 인생은 너무 빠르게 닳아버릴 것 같은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매일을 감정적으로 소비했다. 그들의 인생 곡선을 그린다면 최고점과 최하점에는 대체 어떤 감정이 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만큼 내 눈에 비친 그들의 감정 변화는 이로 말할 수 없이 유동적이었다. 스스로가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닌 조금 변화의 폭이 적은 편이란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리도 다른 타인과 나를 비교해 보면 마치 별세계 사람들 같아서 어린 왕자 없이 그의 행성에 혼자 남은 장미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조금씩의 다름을 품고 산다고 하지 않던가. 아버지도 남동생도 이런 나에 대해 무어라 지적한 적은 없었다. 가끔 어머니가 무어라 말씀하시려던 것 같기도 하지만... 누구나 의견 차이는 있기 마련이니 나의 유년은 조금의 다름을 가지고서도 지극히 평화로웠다 할 수 있다. 

 

다만 너무 평화로운 나머지 나의 유년은 이로 말할 수 없이 무료했다. 이해되지 않는 타인을 보며 지내는 것은 B-612에서 홀로 규칙 없이 흘러가는 은하수를 보는 장미와 같았을 것이다. 좁은 유리관 안에 갇혀 타인과는 격리된 채 단지 흘러가는 것을 보는 이의 시간은 얼마나 무료할까. 스스로 흘러간다 한들 그 흘러감을 느끼게 해주는 불어오는 바람조차 유리관에 막혀 닫지 않으니 이것은 실로 완전한 고립이었다. 내가 없이 흘러가는 세상은 마치 우주처럼 아름다웠지만 나는 결코 그 안에서 함께 흘러갈 수 없으니 아름다운 것은 단지 무료할 뿐이었다.

 

그렇게 우주의 은하가 흘러가듯 시간도 흘러 어느새 유년을 떠나보내고 내게로 온 것은 새로운 작은 사회였다. 초등학교라 함은 입학 전의 모든 아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단어가 아니던가. 그 나이 때 아이들에겐 초등학생이 마치 어른과 같은 존재로 비쳤으니 나 역시 유년기에는 어린아이였기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나 역시 그 은하로 뛰어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따위를 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 생각은 입학과 동시에 산산조각 났으니 난 여전히 유리관 속의 장미였다.

 

그렇게 무료한 매일을 보내던 중 맞이한 평범한 하루였다. 여느 때처럼 흘러가는 시간들과 삼삼오오 부모님이 챙겨준 것으로 보이는 색색의 우산을 들고 하교하는 아이들, 나도 늦지 않게 그 행렬에 참여하여 집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돌아가겠구나 생각했다. 다만 그날은 조금 다른 날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차에 아주 오랜만에 가슴 한구석이 두근거렸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챙겨준 우산이 가방 한 구석에서 덜그럭 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것을 손에 쥐고 버튼을 누르니 자동적으로 펼쳐져 책가방을 맨 내가 들어가기엔 충분한 공간이 생겨난다. 집은 그리 멀지 않다. 차를 타고 20분쯤 걸리니 끽해야 1시간도 걸리지 않을 거리, 한 시간을 내리 걷는 것이 한 시간 동안 체육수업에 참여하는 것보다 힘들지 않을 것은 당연지사. 나는 기껏 내게 주어진 튼튼한 두 다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찰박 찰박

 

이미 땅에 떨어져 물웅덩이를 만든 비 위를 생일선물로 받은 검은색 구두를 신고 걷는 기분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조금씩 젖어 들어가는 양말이 불쾌하긴 하지만 질릴 듯 맡게 되는 비 오는 날의 냄새와 옆에서 들리는 떠드는 소리, 차 지나가는 소리들이 모두 새로운 것들이라 그런 것들을 즐기니 어느 순간 피부에 달라붙는 찝찝함이라던가 양말에 스며드는 빗물은 크게 신경 쓸 거리가 되지 못하였다. 그렇게 푸른 우산을 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를 지나치고 이런 비 내리는 날씨에도 온몸이 검은색으로 도배되어 우산도 쓰지 않은 어른 역시 지나쳤다.

 

-터벅터벅

 

어느새 찰박거리는 소리는 점점 줄어들고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서자 지나가는 차 역시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차로 이동하는 것은 효율적인 면도 있지만 하교하는 길에 인적이 드문 길목이 있으니 무조건 어른이 동행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면 어느새 인기척은 줄어들어 들리는 발소리는 세 개.

 

-터벅터벅

 

그중 무거운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간다. 이 앞에 펼쳐진 길은 어린 아이라 해도 어른과 아이 둘이 걷기엔 조금 비좁은 장소. 하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나의 곁으로 다가온다. 어느새 우산 이상의 그림자가 지고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빗방울을 타고 울린다.

 

"안녕 꼬마야, 혹시 연회장님 딸 맞니?"

 

"...? 네 그런데요."

 

남자의 말에 돌아봐 그를 보니 무어가 그리 즐거운지 입이 찢어지는 미소를 지은 남자는 내게로 손을 뻗었다.

 

"그래? 잘됐구나... 자, 그럼.... 악!!!!"

 

남자의 손이 내게 닿기 직전 남자는 무언가에 찔린 듯 허리 쪽을 움켜 잡았고 그 순간 푸른 우산을 썼던,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쓰고 있지 않고 비를 맞고 있는 남자아이가 내 손목을 잡고 내달렸다.

 

"뛰어!!" 

 

우산으로 남성을 찌른 것인지 그 아이의 푸른 우산은 남성의 뒤쪽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우산 따위에게 시선을 주는 것은 퍽 아까운 일이라 다시 앞을 보며 내 손을 잡아 이끄는 남자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짙은 초록색 머리는 내리는 빗물에 젖어 더욱 진한 색을 내고 앞을 보기에 보일락 말락 한 검은 눈동자는 어두운 밤하늘과 같았다. 처음으로 타인이 눈에 밟혔다. 처음으로 또렷하게 두 눈에 담긴 타인의 얼굴, 그것은 굴절되지 않은 세계였다.

 

다만 평생을 굴절된 유리관 속에서 살아온 장미는 굴절되지 않은 세계를 바르게 보지 못한다. 오히려 굴절되지 않은 것이 장미에게는 굴절된 세계와도 같아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의 굴절로 어린 왕자의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볼 뿐이었다.

 

"헉... 헉..."

 

그렇게 얼마나 도망쳤을까, 어린아이 둘의 달리기 속도로 성인 남성을 이길리 만무하지만 익숙한 지리와 어린아이의 체력, 내리는 비로 인한 미끄러움 덕에 어찌어찌 남자를 따돌린 우리는 내리는 비를 맞으며 길의 한쪽 벽면에 기대어 숨을 몰아셨다.

 

"너 정말 위험했어! 아까 그 아저씨가 너한테 엄청 음흉한 얼굴로 손을 막---"

 

숨 좀 돌렸다고 끊임없이 주절 거리는 남자아이는 무어 그리 할 말이 많은지 내 호응 없이도 한참을 쏟아낼 것 같이 말을 잇는 그에 답답함을 느껴 다짜고짜 말을 끊고 나의 용건을 물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내가 얼마나 위험했는지 따위가 아니니까.

 

"너, 이름이 뭐야?"

 

"나? 나는 권가온! 아홉 살이야."

 

"아, 응. ...근데 나는 열 살인데?"

 

"아, 헐...."

 

내 말에 어쩔 줄 몰라하던 남자아이.... 아니 가온은 소심하게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다 비장한 표정으로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저는 권가온이고 아홉 살이에요...."

 

비장하게 시작한 표정과는 다르게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 작게 웃었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만이었더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리라.

 

"그래, 잘 부탁해. 나는 연 해. 성이 연 이름이 해야"

 

유리관 속이 아닌 우주의 무게를 느끼더라도 직접 마주하는 세상은 이리도 아름답고 즐거우니까. 그날 장미꽃은 오랜 기다림 끝에 어린 왕자를 만나게 되었다.

 

다만 잠깐의 재회는 아주 긴 이별을 뜻했다. 그날 이후로 등원에 무조건 한 명 이상의 경호원을 동행하게 되어 이동에 제약이 생겼을뿐더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고 만나려 해도 만날 수 없었던 그 아이는 하루도 잊지 않았지만 굴절되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 얼굴을 제대로 떠올릴 수 없었다. 그저 그때 맞잡은 손의 온기가 선명하고 주눅 들어가던 그 아이를 봤을 때의 감정만이 더욱더 선명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맞이하게 된 중학교의 졸업식. 아주 오랜만에 가족들이 학교에 오는 날이기에 늦장 부릴세 없이 졸업식이 끝난 후 곧바로 아버지의 차에 몸을 싣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는 무심한 편이긴 하시지만 이런 큰 행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해 내 체면을 살려주시는 분이니 나도 그에 맞는 행동을 보여야 하니까.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중 짙은 녹색 머리를 가진 소년이 나를 지나쳐갔다. 친구들에게 향해 사진을 찍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조용히 걸음을 옮겨 부모로 보이는 이들에게 가 얌전하게 웃는 소년은 그 머리색 만으로도 지난 비 오는 날의 소년을 떠올리게 하기 충분했다. 더욱 히 저 날카롭지도 순하지도 않은 눈꼬리는 흔한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 애 일리 없지.'

 

저렇게 조용히 웃는 아이가 아니었다. 좀 더 활발하고... 오지랖 넓은 조금 귀찮을 것 같지만 눈이 가는 가온은 그런 아이였다. 하지만 저 소년은 달랐다.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소년, 왜인지 그런 분위기에 끌리기라도 한 걸까 그 아이처럼 눈길을 사로잡는 아이였지만 아마 아닐 거다. 너일 리 없어. 그러니 말을 걸 생각은 없다.

 

"아가씨, 회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하지만 참 많이 닮았다. 그래서 오늘따라 네 생각이 나. 하지만 나는 저 멀리 나를 부르는 소리에도 너라는 확신도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걸러 갈 만한 사람은 아니라 아버지의 차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학교의 마지막은 온통 너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너에 대한 생각은 그만해야지. 지나가는 인연일 뿐이니까.'

 

그런 생각과 함께 중학생이었던 나는 성장해 고등학교에서 1년을 보내고 2년째를 보내게 될 무렵 나는 학생회의 부장 직을 맡게 됐다. 한마디로 학생회장 뭐 그런 거.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은 당연하다는 반응이기에 나 또한 별다른 감흥 없이 지나갔다. 가족들의 반응보다 집중해야 할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꽤 많네."

 

1학년들을 대상으로 한 학생회 면접 지원서. 꽤 많은 양이기에 하나하나 훑어보려면 오래 걸리겠지만 허투루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하나하나 따져가며 지원서를 읽어 내려가며 순서대로 면접을 진행하던 찰나, 모든 게 순조로웠지만 하나의 신청서를 발견한 나는 학생회장으로서 신청서를 평가하던 일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권가온?"

 

그곳에 쓰여있던 건 미묘한 눈꼬리를 가진 짙은 녹색 머리의 남자아이. 조용한 인상을 주었던 시선을 빼앗았던 소년. 장미의 어린 왕자. 내 눈앞에 있는 바로 너였다.

 

사실은 너를 잊으려 했다. 그저 유년 시절에 만난 좋은 아이. 아직 세상은 살만하고 이타적인 사람은 실존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해 줄 기회라 생각하고 너를 잊으려 했다. 하지만 너는 이렇게 다시 내 인생에 들어와 굴절되지 않은 유리관 그 너머의 세계로 나를 데려가려 하니.

 

"네, 이번에 학생회 면접에 지원하게 된 1학년 권가온이라고 합니다."

 

처음은 우연이었고 두 번째가 인연이었다면 네가 다시 찾아온 세 번째는 가히 운명일 것이다. 마치 어린 왕자가 지구에서 많고 많은 장미를 보았어도 다시 자신의 장미에게로 돌아온 것처럼. 어린 왕자의 장미는 유일했기에 감히 운명이라 할 수 있었고 장미에게는 오직 어린 왕자만이 자신을 진실된 세계로 바깥으로 데려다줄 수 있기에 그 어린 왕자를 놓칠 생각이 없다.

 

"반가워요. 그럼, 면접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니 감히 말하건대 이것은 곧 필연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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