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기구독 커미션

로판 1화

by 샌드위치 커미 2024. 8. 18.

"엄마.... 아니 어머니 제가 뭘.... 한다고요....?"

 

제 아들의 청력이 의심되는 질문에도 백작가의 안주인이신 백인서 씨는 사교계의 부인들이 짓는 특유의... 그러니까 사랑스러운 아들과의 오전 티타임에서 보일만한 미소는 아닌 웃음을 띠며 친절하게 답해주셨다.

 

"결.혼.이란다. 그리고 저 타국의 말로는 혼인, 혼례, 가약이라고 하지. 대답이 되었을까, 우리 아들?"

 

너무나도 친절하고 타국의 언어로까지 말씀해 주시는 어머니의 배려에 예법에 어긋나게 찻잔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을 다잡으며 달그락 소리가 나지 않게 찻잔을 내려놓고는 몇 번의 심호흡으로 예의 바른 효자의 사고방식을 주입하며 어머니가 차를 두 모금 정도 더 홀짝일 쯤에야 이어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어째서요?"

 

"오, 우리 사랑하는 아드님.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니라고 믿는단다?"

 

나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사고로 도출해 낸 질문으로 어머니의 잔소리를 쏟아내기 직전 마지막 방파제에 걸린듯한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혼기가 가득 찬 모자람 없고 어디 부족한 곳도 없는 백작가의 자제, 그것도 그냥 자제분이 아닌 장남께서 아직까지 혼인은 고사하고 약혼도 하지 않은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그 답변은 해가 지날수록 구체적이며 압박감이 늘어나는 어머니의 잔소리 목록 일 순위로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싫은 것을 어찌하랴. 아무리 가문을 위해 그리고 대를 잇기 위해 혼인을 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그런 목적을 가지고 만남을 있어가는 것은 거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나-에 나랑 --하는 -야!"

 

...모르겠다. 뭔가 싫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귀족들의 중매 방식은 도통 나랑 맞지 않았다.

 

"그러게 이렇게 되기 싫었다면 진작에 친한 공자나 영애를 잡으라고 귀가 닳도록 말하지 않았니."

 

"걔네들은 이성으로 안 보인다고요..."

 

그렇다고 아는 이들이랑 하기에도 뭐 한 것이 대부분 이미 약혼자가 있거나 혼인을 한 이들이며 그렇지 않다고 한들 딱히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지라... 그 녀석들과 혼인을 하느니 차라리 어머니의 후보 리스트에서 하나를 골라잡는 것이 훨씬 나을 정도였다.

 

"후우, 그러지 말고 좋게 생각해 보렴. 이번에 혼담제안이 들어온 곳은 유서 깊은 후작가란다. 한 후작가라면 너도 알고 있지 않니?"

 

"....네? 한 후작가에서 저를 왜?"

 

한숨으로 이어진 어머니의 말에 다과를 집지도 않았건만 컵케이크를 베어 물어도 좋을 만큼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 후작가라니? 후작가인 것은 둘째 치고라도 유서 깊기로는 공작가 부럽지 않은 후작가문이었다. 게다가 그곳에 하나뿐인 영식은 친절하면서도 선 긋는 것이 확실한 것으로 사교계에서도 꽤 이름 높을뿐더러...

 

"저희 가문이랑 아무런 접점도 없지 않아요?"

 

나 그리고 우리 가문과 아무런 접점도 없는 곳이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 하지만 우리 가문은 돈이 많을 뿐 그리 유서 깊은 가문이 아닐뿐더러 돈을 보고 혼담을 제안하기에는 한 후작가는 그리 재정이 어려운 곳이 아니었다.

 

"얘는, 접점이야 이제부터 만들어가면 되는 거잖니. 말 나온 김에 잘됐구나. 나흘 뒤에 한 공자께서 방문하기로 하셨으니 이참에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렴."

 

"오... 혹시 그 만남에 사전에 제게 이루어진 통지나 제 의사는 들어가지 않는 건가요?"

 

"당연한 것을 왜 묻니."

 

그 대답을 끝으로 우리의 백인서 후작부인께서는 여유롭게 차 한잔을 홀짝이셨다. 예정도 없는 혼담에 만남까지 진행하게 된 아들 앞에서 말이다. ....아직은 약간 썰렁한 봄이였다.


 

다행스럽게도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결혼상대를 만나기까지의 내 일상은 의외로 그간의 일상처럼 평범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에그베네딕트와 함께 매번 바뀌는 홍차의 향을 즐기고 교육을 얼마나 잘 받았는지 제 주인 앞에서 한시도 입을 멈추지 않는 전속시녀님의 입에서 어떻게 아는지 모를 사교계의 소문과 그녀의 룸메이트 메리의 연애사를 들으며 후계자의 본분을 다했다. 더없이 평범한 날들, 그 때문일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백 공자. 한 후작가의 한가원이라고 합니다."

 

결혼상대와의 만남 약속을 그만 까맣게 있고 있었다. 이것은 내 잘못이라기 보단 전적으로 내 전속시녀인 세라의 잘못이노라 말할 수 있다.

 

'자기가 제일 즐겼으면서...!!"

 

당사자보다 빠르게 나의 결혼 소식을 알게 된 세라는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려줌과 동시에 그간 결혼 독촉에 시달렸던 나를 신나게 놀리며 누구보다 나의 결혼소식을 즐겼다. 그러면서도 점점 한 공자의 이야기를 줄이더니 약속 하루 전에는 아예 한 공자의 이야기를 쏙 빼고 조잘조잘 떠든 것이다. 이 다분히 고의적인 모습에 나는 세라의 휴가를 아주 즐겁게 해 주기로 다짐했다.

 

"음... 저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백 백작가의 백도화라고 합니다."

 

다만 현재 중요한 것은 세라의 끝장나는 휴가 따위가 아니다. 내가 당장이라도 해결할 수 있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 문제는...

 

"...."

"...."

 

통성명 후 우리에게 내려앉은 어색한 침묵이다. 한평생 이리 어색한 침묵을 겪어본 적 없노라 단언할 수 있다. 대체 왜 그 많은 가정교사들 중 결혼상대와 나눌 간단한 스몰토크 주제를 알려준 이가 없었는지, 후계자 수업과 병행하며 뼈 빠지게 들은 가정교사들의 수업이 모두 무의미 해진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

"저기...."

 

기나긴 침묵 끝에 동시에 내뱉은 침묵을 깨는 말은 오히려 이 어색한 침묵을 더욱 고조시킬 뿐이었다.

 

"아, 먼저...."

"그... 아뇨, 공자께서 먼저..."

 

'어색해...!!'

 

침묵 속에서 들리는 것은 이 침묵을 버티지 못하고 간간이 울리는 차를 홀짝이는 소리와 옷자락 스치는 소리 따위였다.

 

"...."

"...."

 

차마 눈조차 마주하지 못하고 한참을 일렁이는 홍차의 표면을 보다가 힐끗 올려다본 공자의 얼굴은 의외로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 침묵이 한없이 불편한 나와는 달리 조금 상기되어 있는 두 뺨과 기대감이 들어찬 눈 그럼에도 부끄러움과 이성 따위가 그것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는 그런 얼굴.

 

'무덤덤하다고 들었는데...'

 

역시 소문은 믿을게 못되나 보다. 그런 생각 따위를 하며 어색한 침묵 속 주어진 시간에 나는 그의 얼굴을 가만 뜯어보기 시작했다.

 

'....인기가 많을만하네.'

 

짙은 고목을 닮은 결 좋은 머리는 하나로 깔끔하게 묶어 올려 단정하다는 인상을 주며 녹음을 닮은 듯한 두 눈은 달밤의 에메랄드처럼 잔잔한 푸르름을 머금고 있었다. 감정을 숨기는데 익숙지 않은 이들이라면 작게 "와." 하는 감탄사가 튀어나올 정도의 선이 곧은 미인. 뭔가 이런 사람이 내게 뜬금없이 구혼해 왔다는 것이 다시 멀게만 느껴지면서도...

 

'....싫지 않네.'

 

왜인지 시선을 피하고 싶어지는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공자?"

 

다만 너무 집중하여 그의 얼굴을 봤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부터 녹음을 머금은 푸르른 눈동자가 나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네?! 네...넵...?!"

 

그것에 너무나도 놀라 우스꽝스러운 대답을 뱉어버리고 스스로도 부끄러워 열 오른 얼굴에 작게 손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였을지.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숨고 싶을 지경이다.

 

"....제, 얼굴을 빤히 보신곳 같아서. 혹 무슨 문제라도?"

 

어느샌가 제 얼굴을 만지작 거라며 약간의 불안감에 흔들리는 그의 눈빛에 나도 모르게 장난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저 두 눈에 당황을 새겨주고 싶다. 저 녹음이 나라는 바람으로 잎을 흔들면 좋겠다. 그런 생각 따위가 들어서 나도 모르게 입이 열린 것은 불가항력이라 말해두겠다. 저런 얼굴로 그런 표정을 하면 내가 아닌 누구라도 나처럼 행동하고 말 테니까.

 

"공자가 잘생겨서요. 제 취향이거든요."

 

그리 말하며 친구들도 인정한 특유의 장난기 서린 미소를 띠곤 그제야 아차 싶었다. 혼담이 오가는 사이라지만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닌 공자께 너무 실례되는 말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한 박자 늦게 불안한 얼굴로 눈앞의 그의 얼굴을 봤다.

 

"...."

 

붉게 물든 목을 한 손으로 잡아 가리며 미처 가리지 못한 두 귀는 타오를 듯 붉게 달아올라 있고 다른 손으로는 약간 벌어지는 입가를 힘겹게 가리며 녹음을 머금은 푸르른 두 눈은 어찌할 줄을 몰라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 큰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고 소문처럼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선을 긋는 무덤덤한 공자라는 것이 전혀 믿기지 않는 행동. 다만 그보다 더욱 믿겨지지 않는 것은 그 모습을 보고 든 나의 생각이라.

 

'....귀엽네'

 

우습게도 다 큰 성인 남성을, 그것도 나보다 한살이나 더 많은 남자를 귀엽다 생각해 버렸다. 드디어 미쳐버렸나 싶지만 다시 봐도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그 모습이 귀엽고 흥미가 가서 계속 장난을 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충동적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 버리고 말았다.

 

"한 공자."

"....네?"

 

아직 당황이 가시지 않은 모습으로 여전히 입과 목가를 가린 손을 떼내지 못한 채 화들짝 놀라 대답하는 그 꼴이 퍽이나 웃기면서도 여전히 귀엽게 보였다. 세라가 차에 무어 이상한 약이라도 탔는지 정신을 한번 차리려고 차를 홀짝여도 여전히 그리 보이는 모습에 결국 포기하고 웃음을 흘리며 나의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자주 볼까요. 저희?"

 

그 말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 커지는 그의 두 눈은 분명 장신구로 만들면 현존하는 장신구중 가장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튼 간 한참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이 이내 곱게 그러나 완전히는 아니게 접혀 곱게 눈웃음 지어지며 내 귓가를 간질이는 조금은 허스키하면서도 청량한 목소리가 울렸다.

 

"네, 물론 좋아요."

 

원치 않았고 아직도 그다지 바라지는 않는 혼담이지만 그 상대가 눈앞의 이 사람이라면 왜인지 무심코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버리는 정말 이상한 첫 만남에서의 일이었다.

'정기구독 커미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여름  (0) 2024.08.25
로판 2화  (1) 2024.08.25
편지  (0) 2024.08.18
아침이 오기까지  (0) 2024.08.18
가원 도화 로판 프롤로그  (0) 2024.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