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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인형

by 샌드위치 커미 2024. 11. 7.

당신과 재회한 그날은 평범한 날이었어요. 모두들 평범한 아침을 보냈고 저는 마스터와 함께 등교했으니까요. 하나 특별한 것이 있다면 그날 반에 전학생이 온다는 선생님의 말씀이었을까요. 갑작스러운 전학생이지만 저는 기뻤어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거니까요. 전학생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분명 마스터도 기뻐할 테니까... 그래서 저는 기쁜 마음으로 전학생을 기다렸어요. 그 전학생이 당신이라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지는요.

"자, 나린아. 모두에게 인사하렴."

선생님의 말에 열려있는 앞문을 통해 들어온 당신은 많은 게 달라져 있었어요. 짧았던 자수정을 닮은 보랏빛 머리는 어느새 길어져 날개뼈 아래에서 살랑거렸고 저를 선반에 두고 눈 맞출 만큼 작았던  키는 어느새 훌쩍 커서 인간이 된 지금의 저보다 커 보였어요. 하지만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었죠. 저를 내려다보던 매섭게 올라간 눈초리는 여전히 내려갈 줄을 모르고 흔히 말하는 것처럼 매혹적이게 올라가 있었고 저를 보며 올라가고 내려가기를 반복했던 입꼬리는 여유롭게 찢어져 웃는 인상을 띄고 있었어요. 알아보지 못할 수 없었어요. 당신이었어요. 나의 주인님. 나의 나린. 아니, 이제는 아니에요. 당신은 더 이상 나의 주인이 아닌 한때 나의 주인이었던 사람. 그러니 더 이상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사람.

"안녕, 나는 나린이야. 최근에 이사와서 전학 오게 되었어. 앞으로 잘 부탁해."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제 귀를 찔러왔어요. 저는 이 목소리를 결코 잊을 수 없었어요. 다정하고 사근사근한 애정이 담긴 목소리가 들릴 때면 언제고 저는 바닥을 뒹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조차 좋았던 때가 있었어요. 그저 제게 할애되는 관심이라는 것에서 그게 어떤 형태라도 괜찮았던 때가요.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마스터의 다정함을 알아버린 지금은, 마스터의 애정을 알아버린 지금은 달라졌어요. 더 이상 당신이 주었던 알량한 관심에 매달리지 않아요. 그러니까 저는 이제 괜찮아요. 더 이상 당신이 두렵지도, 그럼에도 당신의 애정을 갈구하지도 않아요. 분명...

"얘, 왜 그렇게 떨고 있어? 반가워. 연호지? 선생님이 네 옆에 앉으라고 했는데 들었을지 모르겠네."

"괜찮... 괜찮아요."

분명 그래야 할 텐데... 어째서 그렇게 손이 떨렸을까요. 어째서 숨이 차올라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까요. 인간의 몸은 이상해요. 무엇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요. 정말로 어째서였을까요. 어째서...

"... 정말 괜찮은 거야? 얼굴이 말이 아니네."

걱정하는 척하지 말았으면 했어요. 당신은 언제나 나를 괴롭게 했었으니까요.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고통스럽게 했으면서, 어째서 내게 다정하고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나요. 내가 인간이 되어서 인가요? 내가 애초에 인간이었더라면 당신이 내던지지 않고 관절이 꺾이지 않으며 먼지 가득한 틈에서 방치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건가요. 당신에게 버려지지 않았을 수 있었던 건가요. 내가 인간이었다면...

"선생님! 짝꿍 상태가 이상해서 보건실에 데려다주고 올게요."

당신은 이전처럼 우왁스러운 손길이 아닌 다정한 손길로 저를 이끌어 갔어요. 맞잡은 손에서 그때와 같은 온기가 올라왔어요. 당신에 이끌려 걷고 있지만 무엇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마스터가 보고 싶었어요... 모두가 보고 싶었어요...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뿌리치고 싶었죠. 허나 그 이상으로 금방이라도 맞잡은 손이 저를 뿌리치고 바닥으로 내던질까 무서웠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마스터를 찾았죠. 이렇게 말이에요. 마스터... 어딨나요 마스터... 저를 버리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요. 함께 있어 주시겠다고 했잖아요... 마스터...

"걱정 마, 누워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어느새 푹신한 침대의 감촉이 느껴지고 안심한 듯 발랄한 당신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그 잠깐 사이 당신이 저를 이끌고 보건실에 도착했는지 익숙하지 않은 소독약의 냄새가 코를 찔렀어요. 하지만 누워서였을까요 아니면 계속해서 마스터를 찾았기 때문이었을까요. 아까보다는 숨쉬기가 조금 나아져 눈물이 핑 도는 게 느껴졌어요. 눈을 감으니 당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쿵쾅거리는 심장의 박동이 조금씩 잦아드는 게 느껴졌어요. 당신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아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은 마스터가 다정하게 불러주는 제 이름이었어요. 그래요. 저는 더 이상 ■■가 아니에요. 저는 마스터의 연호예요. 더 이상...

"이제 좀 괜찮아?"

갑작스럽게 들리는 당신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급하게 숨을 들이켰어요. 당신의 한마디에 몸이 얼어버려 눈을 뜨지조차 못하고 그대로 멈칫하자 당신은 무슨 오해를 했는지 이전에 저에게는 들려준 적 없는 작고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제 관절을 꺾었던 길고 얇은 손가락으로 제 앞머리를 살살 쓸어주는 게 느껴졌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신이 답을 바라고 질문하지 않은 것일까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이만 올라가 달라고도 말하지 못하는 제 모습은 마스터에게 보일 수 없을 만큼 한심하다 생각했어요.

"있지, 사실 아까부터 네가 신경 쓰였어."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은 잔잔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어요. 듣고 싶지 않지만 인형일 때도 인간일 때도 들려오는 당신의 목소리를 거부할 수는 없었어요.

"넌 내 인형과 닮았거든."

순간 인간의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어요. 저를 알아보던 걸까요? 아뇨, 그럴 리 없어요. 어떤 인간이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인형이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하겠나요. 제 생각대로 당신은 저를 알아본 것 같지 않았어요. 단지... 저를 보고 저를... 아뇨, ■■을 떠올리는 것뿐이었어요. 당신이 버렸으면서, 어째서 이제 와서 그렇게 아련한 목소리로 저를 떠올렸나요?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 이상으로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단지... 마스터가 보고 싶었어요.

"내가 정말 아끼던 인형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서 보여줄 수 없는 게 아쉽네."

거짓말이었어요. 정말로 저를 아낀다면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잖아요. 정말로 저를 아끼는 마스터는 그런 짓 따위 하지 않았어요. 저를 아껴주고 사랑해 줬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하는 말은 거짓말이 분명했어요.  분명했지만... 그 말은 정말로 듣고 싶었던 말이라. 의지와는 다르게 뜨거운 눈물이 제 볼을 타고 흘렀어요.

"...?! 우... 울어? 인형과 닮았다고 해서 기분 나빴어? 미안해! 칭찬이었어!"

"아뇨... 아니에요. 괜찮으니까요... 돌아가주세요. 수업이 시작했을 거예요."

"아... 어, 응. 그럴게."

겨우 터진 말로 당신을 돌려보낸 저는 보건실의 침대에서 많이 울었어요. 분노였을까요 미련이었을까요. 그도 아니라면 다른 감정이었을까요.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어요. 하나 확신할 수 있다면 저는 당신의 목소리에 얼지 않았으면 분명 그때 눈을 떠 당신을 바라봤을 거예요. 한심해요. 저의 주인은 이제 마스터예요. 더 이상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은 이미 저를 매정하게 버려버렸으니까요. 하지만 어째서 아직 제 안에서 당신이 사라지지 않은 걸까요. 어째서 당신이 아직 제 안에 뿌리 박혀 살아 숨 쉬고 있는 걸까요. 싫어요... 싫지만... 그 이상으로 완전히 버림받지 않았다고 안심하게 되는 제 자신이 싫어요
 
그래서 그 후로 당신을 피해 다녔어요. 물론 짝꿍이라 만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이요. 당신은 제가 ■■을 닮았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관심을 보였지만 저는 더 이상 당신에게 할 말이 없는걸요. ...아뇨, 실은 묻고 싶은 것도 원망하고 싶은 것도 많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것뿐이에요. 저에겐 이제 마스터가 있으니까요. 당신에게 단 한 점의 미련도 남기고 싶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은 왜 이렇게 제게 각박한 걸까요. 현장학습에서 짝꿍이란 이유로 당신과 같이 다니게 되었을 때 저는 선생님을 조금... 사실은 조금 많이 원망했어요. 하지만 당신을 납득시켜서 따로 다닐만한 그럴듯한 명분도 없으니까요. 저는 어쩔 수 없이 당신과의 동행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은 분명 당신과 함께하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일 거예요. 이전과 같이 당신과의 나들이를 기대하는 ■■은 없어요. 당신이 매정하게 버려버렸으니까요. 그러니까... 이게 기대감일리 없어요. 그건 더 이상 당신에게 허락한 감정이 아니에요. 제 기대도 설렘도 모든 건 마스터의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와, 이것 봐 연호야. 여기 바닥 빼고 모든 면이 투명해."
 
당신의 들뜬 목소리에 제가 기뻐할 리 없어요. 당신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던 건 언제나 제가 만신창이가 된 이후의 일이니까요. 그때를 생각하며 멍해진 저를 당신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현실로 이끌었어요. 비단 제정신뿐만 아니라 제 옷소매 역시 당신의 손에 이끌리고 말았죠. 당신과 저는... 우리는 함께 벽면으로 다가가 검은 듯 푸른 물과 그 안의 다양한 물고기를 감상했어요.
 
"정말 아름답지 않아? 이 물고기들은 모두 관상용이지? 난... 이런 게 너무 좋아."
 
황홀하다는 듯 말하는 당신의 얼굴이, 목소리가 그때의 당신과 너무 유사해 심장소리가 시끄럽게 귓가를 울렸어요. 깊은 푸른색은 제 속을 매스껍게 만들었고 당신의 머리를 닮은 보랏빛 눈동자는 끊임없는 어둠 속으로 저를 끌고 들어갈 것만 같았죠.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당신의 말에 맞장구를 쳤어요. 그 말에 당신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어요. 저는 이 표정을 알고 있었어요. 저를 실컷 망가뜨리고 나서, 저와 같은 관상품들을 한껏 망가뜨리고 만족스럽게 지었던 그 미소였어요. 그래서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았어요.
 
"그래? 그럼 연호 너도..."
 
눈물이 차오르고 턱 막힌 숨에 폐가 쪼그라들며 산소를 갈구했어요.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손끝하나 까딱 할 수 없는 적나라한 공포 속에서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자신이 한심했어요. 그리고 그보다 한심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마스터를 찾고 있는 스스로였어요. 도와줘요 마스터. 살려주세요. 마스터... 마스터가 필요해요...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마스터. 저 너무 이상해요... 분명 마스터가 보고 싶은데, 마스터를 찾고 있는데... 어째서... 
 
"이런 것들이 망가지는 순간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니?"
 
어째서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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